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2001년 한국시리즈 (문단 편집) == 개요 == ||<-2><:> {{{+2 {{{#edd36c '''삼성 fn.com배 2001'''}}} {{{#edd36c '''프로야구'''}}} {{{#ffffff '''한국시리즈'''}}}}}} || ||<:> [[파일:두산 베어스 심볼(1999~2009).svg|width=120]]||<:> [[파일:삼성 라이온즈 심볼(1995~2007).svg|width=70]]|| ||<:> [[두산 베어스|{{{#FFD700 {{{+1 '''두산 베어스'''}}}}}}]]||<:> [[삼성 라이온즈|{{{#FFFFFF {{{+1 '''삼성 라이온즈'''}}}}}}]]|| [[파일:external/imgnews.naver.net/%25BD%25BA%25C6%25F7%25C3%25F7%25C3%25E1%25C3%25DF.%25B1%25E8%25C0%25C0%25BF%25EB17.jpg|type=w540]] 2001년 정규리그 1위인 [[삼성 라이온즈]]와 3위인 [[두산 베어스]]의 맞대결로 진행되었던 2001년 [[KBO 한국시리즈]]에 관한 문서. 당시 두산의 정규 시즌 성적은 65승 5무 63패로 5할을 겨우 넘기고 5할 1푼에도 도달하지 못했는데(0.508), 이는 '''포스트시즌에 탈락한 2006년 두산보다도 더 낮은 승률'''이었다. 그 원인은 [[타이론 우즈|우]][[심재학|재]][[김동주(타자)|주]]로 대표되는 강력한 타선에 비해 굉장히 암울한 투수진이었는데, 팀 내 최다승 투수의 승수가 '''9승[* 이혜천, 진필중]'''이었다.[* '''한국프로야구 역사상 유일하게 10승 투수 단 한 명도 없이 우승한 사례'''다. 이를 반영하듯, [[프로야구매니저]]에서 2001 두산의 투수진은 전부 코스트가 3코스트~6코스트로만 구성되어 있다.] 또 규정이닝을 채운 투수가 선발과 계투를 오갔던 [[이혜천]] 달랑 1명이었다.[* 그해 이혜천은 9승 6패 3세이브 6홀드(홀드 부문 7위), 출장경기 수 10위(53경기), 방어율 6위(3.62), 탈삼진 10위(107) 등 전천후로 굴려지며 두산의 우승을 견인하였다. 특히 한국시리즈에서는 전 경기 출장의 위업을 달성하며 혼자 2승을 거두었다. ~~0.5최동원~~] 심지어 정규 시즌 3위였던 두산은 1위 삼성과의 승차보다 오히려 당시 최하위였던 롯데[* 다만 이 시즌에는 4위 싸움이 박터져서 4위와 8위와의 게임 차가 단 2게임밖에 나지 않았다는 걸 고려해야 한다. 그 해 롯데는 '''역대 최고승률 꼴찌'''(.457, 59승 4무 70패)였다.]와의 승차가 더 적었을 정도였다.[* 정규시즌 1위 삼성이 -13.5, 정규시즌 2위 현대가 -6.5인데 정규시즌 4위 한화가 4.5경기 차고 정규시즌 7위 SK, 8위 롯데가 6.5경기 차.] 투타의 전력으로 보자면 타자는 백중세였지만 투수력에서 삼성의 전력이 압도적이었다. 타격은 두산이 언제나처럼 최상위권의 활약을 해준 타이론 우즈와 김동주는 물론이요 그해에 각성한 [[심재학]]이 [[심정수]]의 공백이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수준이 아닌,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는 [[펠릭스 호세]]에 이어 전체 WAR 2위로 활약하여[* 당시 투수들 중에 2점대에 15승을 찍은 투수가 하나도 없을 정도로 타고투저] 커리어하이를 찍었고, [[정수근]]이 99년에 이어 3할타자로 복귀하였으며, 하위 타선의 [[안경현]], [[홍원기]], [[홍성흔]] 등도 만만치 않은 인물들이었다. 삼성도 [[김기태(1969)|김기태]]가 노쇠화 및 김응용 감독과의 불화로 해당 시즌에 단 한개의 홈런도 쳐내지 못했으며 부진하였으나 그 자리를 [[마해영]], [[매니 마르티네스]] 쌍마가 훌륭하게 메워주웠고, [[박한이]]가 신인왕 후보에 오를정도로 타선에 활력소 역할을 해줬다. [[이승엽]]이 타율은 낮았지만 그해 OPS 3위였으니 나름 본인 몫은 했으며, 오히려 WAR 순위는 첫 홈런왕에 최다안타를 차지했던 1997시즌보다 높았다. 오히려 낮은 타율 때문에 저평가를 당한 한해였다. 이를 전체적으로 따져 보면 팀 득점과 팀 OPS같은 경우 두산:삼성은 739:732, .807 : .780으로 비슷하거나 두산이 미세하게 우위에 있다고 볼 수 있었다.([[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]]을 쓰면 OPS는 장타율이 줄어 손해를 보기 때문이다.) 그러나 투수진을 보면 두산은 선발투수는 커녕 불펜투수조차 10승 투수가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유일한 한국시리즈 우승을 일궜을 정도로 형편없었다. 그 해에 8개 구단가운데 10승 투수가 단 1명도 없었던 유일한 구단이다.[* 그래서 당시 삼성의 투수코치였던 [[이선희(야구)|이선희]]가 '''"어떻게 두산한테 집니까? 두산에 (투수가) 누가 있다고…"'''라는 말을 한 것. 지금도 [[야구는 투수놀음]]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, 하물며 당시에야…] 당초 베어스의 에이스였던 [[박명환]]은 전년도 처럼 부상으로 들쭉날쭉하게 등판했으며 나머지 투수들도 모조리 부상 내지는 없느니만 못한 수준이었다. 용병투수 둘 또한 트로이 닐[* 파머를 퇴출이 확정되고, 이태원에서 파머, 닐, 닐의 아내가 술을 마시다가 식당에서 시비가 붙는 바람에 닐도 같이 퇴출되었다.]의 대체용병이었던 배넷은 한국 생활의 적응에 어려움을 겪었는지 부진을 면치 못하였으며 한국시리즈에서는 출전조차 하지 않았다. SK에서 온 빅터 콜은 배넷보다는 나았지만 그냥 없는 것보다는 약간 나은 수준 정도였다. 스윙맨으로 노예생활을 했던 [[이혜천]]과 철벽 마무리였던 [[진필중]] 그리고 방어율은 그닥 좋지 않지만 좌완 계투로서 그럭저럭 막았던 [[차명주]] 등 불펜에 의존할 수 밖에 없던 상황이었다. 반면 삼성은 [[임창용]], [[배영수]], [[김진웅]], [[발비노 갈베스]] 무려 4명의 10승투수를 배출했으며, 중간투수에는 [[김현욱(야구)|김현욱]], [[전병호]] 등이 포진해 있었고, 시즌 초반 훌륭한 마무리투수 역할을 맡았던 벤 리베라가 부상으로 퇴출당하자 김진웅이 시즌 후반 마무리 전업을 했는데 나름 훌륭하게 막으면서 투수진은 구멍이 없는 듯 보였다.[* 하지만, 쓸만한 좌완투수로는 [[전병호]] 밖에 없었고 이 같은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하여 2001년 시즌이 끝난 뒤 SK와의 6-2 트레이드를 통해 [[오상민]]을 데려왔으며 다음 해 시즌 중에는 [[나르시소 엘비라]]를 영입하여 좌완선발 갈증의 한을 풀었다] 게다가 두산은 [[한화 이글스]][* 해당 시즌 4위 한화의 승률은 0.473에 불과했으며, 두산은 2승으로 가볍게 스윕승을 거두면서 1999년 승률 1위를 하고도 한국시리즈를 못간 한을 풀었다. 한화는 신인왕 김태균의 홈런을 앞세워 1차전 4:1로 앞서갔지만, 5회 우즈한테 쓰리런을 맞고 결국 패했고, 2차전은 1회 '''8실점'''을 해버리며 그대로 패했다.]와의 준플레이오프, [[현대 유니콘스]]와의 플레이오프를 거치면서 선수들의 체력이 소진되었으며, 주전 선수 다수가 부상당한 터라 다들 이번만큼은 삼성이 이겨서 '''달구벌의 저주'''[* 삼성은 한국시리즈에 올라가면 힘도 제대로 못 써보고 졌기에 이런 소리를 들었다. 이 저주는 이듬해인 [[2002년 한국시리즈|2002년]]에 이르러 깨졌다.]를 깰 거라고 믿고 있었다. 이를 위해 삼성으로서는 원수나 다름없는 해태의 [[김응용]] 감독까지 모셔왔고,[* 프로야구 개막 이후로 삼성을 한국시리즈에서 '''가장 많이 물먹인 감독'''이 김응용 감독이다. 그 정도로 당시 삼성이 얼마나 우승을 갈망했는지를 보여준다.] 객관적인 전력도 더 우위에 있었기 때문이다. '''그러나...'''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